
최근 한 식품업체 연구소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우리 국민이 1인당 소비한 커피는 452잔에 달한다. 거리를 거닐다보면 몇 걸음만 옮겨도 커피전문점이 쉽게 눈에 띄는 것은 물론, “밥은 굶어도 커피는 거를 수 없다”는 소비자층이 있을 정도이니 가히 커피 공화국이라 부를 만하다.
이런 상황에서 몇 해 전부터 자연히 각광받고 있는 직업이 있으니 바로 ‘바리스타(Barista)’다. 1년에 4번 있는 바리스타 자격 필기 시험엔 한 번에 1만여명에 달하는 인원이 몰릴 정도로 인기가 뜨겁다. 사회 초년병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까지 바리스타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지금, 한국 바리스타의 대부이자 국내에 최초로 바리스타 자격시험제도를 도입한 한국커피교육협의회 고문 허경택(식가 70·상지영서대 조리음료바리스타과 교수) 동문을 만나봤다.
제과제빵 교육하며 커피와 인연
건국대 식품가공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축산물이용학전공 농학박사를 취득한 그가 커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0년 상지영서대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원주에서 군생활을 했고, 직장도 이곳에서 다니게 됐으니 ‘원주와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원주에 뭔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고민하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방학 기간에 제과제빵을 가르쳤어요. 당시엔 원주에 제과제빵을 가르치는 곳이 없었거든요. 그래서인지 반응이 폭발적이라 제 연구실은 늘 문전성시를 이뤘지요(웃음).”
상황이 이렇다보니 학장은 그에게 대학 내 평생교육원을 설립해볼 것을 권유했고, 2000년 초대 원장을 역임하며 더 많은 시민들과 가까워질 기회를 갖게 됐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는 녹차 마니아였지만 한국에서 거의 매일 케이크를 만들다보니 단맛을 보완해 줄 음료로 자연히 커피를 찾게 됐어요. 관심을 갖다보니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게 됐고, 연구년 동안 내내 커피에만 매달렸습니다. 유럽 스페셜티커피협회(SCAE)에서 발행하는 국제 공인 바리스타 자격증도 취득했고요.”
당시에는 원두커피 붐이 일기 직전이라 바리스타에 대한 수요가 많지 않았지만 허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커피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즐기는 기호식품이지만 이에 대한 기초 지식이 부족해 ‘제대로’ 커피를 즐길 줄 아는 이들이 많지 않았거든요. 소위 말하는 맛있는 커피를 맛보기도 쉽지 않았고요. 문화 수준이 높아지는 것과 비례해 자연히 커피에 대한 수준도 올라갈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루빨리 제대로 된 커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국내 최초 바리스타 자격제도 도입
그는 2005년 상지영서대학 내에 관광조리음료과(현 조리음료바리스타과)를 신설하는 한편, 그와 뜻을 같이하는 전문가들과 함께 한국커피교육협의회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전문적으로 잘 배운 바리스타 양성이 시급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시엔 바리스타라는 직업이 생소했거든요. 이에 국내 최초로 바리스타 자격제도를 도입, 2005년 11월 첫 자격시험을 실시했습니다.”
바리스타 자격증은 민간 자격증이지만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굉장히 까다로운 선발과정을 거치고 있다.
“지난 한 해 1만5000여명의 바리스타가 배출됐어요. 이들 모두가 바리스타로 활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년 그 수가 증가하고 있으니, 커피에 대한 관심을 잘 반영하고 있는 셈이지요. 원주 같은 경우엔 인구가 31만명에 불과하지만 커피 교육을 빨리 시작해 커피 문화가 굉장히 발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타지역과 비교해 40~50대 바리스타도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그만큼 저변확대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지요. 현재 저도 원주문화원에서 60세 이상을 대상으로 매주 금요일 ‘실버 바리스타 과정’ 교육을 담당하고 있지만 연세가 있으신 분들도 바리스타에 대한 열정이 상당해 매번 깜짝 놀랍니다.”
그는 바리스타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한국의 커피산업이 발달하면서 다양한 나라에서 고급 생두가 수입되고 있어요. 재료의 품질이 좋아졌으니 이제 그 재료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전문가가 필요한 시점이 된 거지요. 어떻게 로스팅을 하고, 머신에서 커피를 어떻게 추출하는지가 중요해진 겁니다. 커피 가루의 입자 굵기에서부터 크레마(에스프레소 추출 시 상부에 뜨는 황금색 크림)의 밀도 등 아주 작은 차이로도 커피 맛은 확연히 달라지거든요. 기술적 숙련도 못지 않게 서비스 마인드도 중요하고요. 바리스타는 커피를 찾는 손님에게 맛있는 커피를 친절하게 대접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그는 이런 점에 있어서 ‘아직 한국은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수많은 커피전문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은 커피 소양이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단순히 기계 작동하는 법만 배우고 일을 하다보니 커피 문화 전반을 이해하고, 정성을 다해 커피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을 수밖에요. 또 인테리어와 설비 투자에 쏟는 비용이 너무 크다 보니 커피값이 지나치게 비싼 것도 문제입니다. 그렇다 보니 대규모 커피체인점보다는 커피를 제대로 배우고 즐길 줄 아는 바리스타들이 소박하게 운영하는 전문점에서 더 맛있는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경우가 많지요.”
커피의 날 제정해 커피 문화 확산
커피문화 보급을 위한 그의 노력은 저서 <와인&커피 용어해설집> 제작과 커피의 날 제정으로도 이어졌다.
“한국커피교육협의회에선 햇콩이 나오는 10월1일을 ‘커피데이’로 지정했어요. 원주에선 제가 운영하는 ‘닥터 허 커피 연구소’가 주최가 돼 ‘커피향기 따라 느리게 걷기’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300여명의 시민이 참여해 박경리 문학공원에서 매봉마을까지 걷기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가는 길에 맛 좋은 커피전문점이 많아 중간중간 들러 커피 지식도 쌓고 시음도 하는데 반응이 상당히 좋습니다.”
이달 중엔 원주 시내에 로스팅 전문점 ‘닥터 허 커피’를 열 준비로 한창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질좋은 원두를 찾는 이들에게 저렴하게 공급하고자 기획했습니다. 제가 블렌딩한 맛좋은 커피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무료 시음도 할 예정이고요. 닥터 허 커피가 원주의 ‘커피 사랑방’으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지요.”
그는 커피를 제대로 즐기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가장 기초라 할 수 있는 ‘에스프레소’를 제대로 즐기는 팁을 전했다.
“사실 원두커피를 처음 접하는 이들 중엔 에스프레소의 강하고 진한 맛에 깜짝 놀라 그 뒤로는 다시 원두커피를 마시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웃음). 우선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한두 스푼 넣고 두세 번만 휙 저으세요. 설탕이 일부만 녹은 상태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면 쓰지 않고 깊은 향을 즐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밑부분에 엉겨 있는 설탕을 스푼으로 떠먹어보세요. 에스프레소의 매력에 금세 빠지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