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딜리아니-잔느의초상 |
예술, 사랑이란 줄기에 피어
난 눈물의 꽃
누구든 소위 눈에 콩깍지가 씌워지면 찰나이던 영원이던 관계없이 앞뒤 안 가리고 뜨거운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된다. 그것은 마치 ‘여자의 마음’처럼 도무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와 불현듯 가슴에 꽂힌 채 평범하던 일상을 미지의 세계와 같이 낯설고 환희에 찬 신비로움으로 채색하곤 한다. 그러나 사랑이란 행복을 주면서도 아픔을 주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황금빛 찬란함과 같지만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하는 악마의 유혹과도 유사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만큼은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환상적인 상태에 몰입되며 죽을 만큼 아픈 상처를 받더라도 늘 그 묘한 마력에 빠져 불나방처럼 몸과 마음을 불사르기도 한다. 물론 사랑 앞에서는 위대한 세계를 창조했던 예술가들의 사랑도 그저 평범하기만 하다. 단지 기질이 달랐을 뿐 우리네 사랑과 그들의 사랑이 근본적으로 크게 다른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예술가들도 사랑 때문에 고민했고 그것으로 인해 좌절하거나 슬퍼했으며 때론 아예 사랑을 거부한 경우도 있었다. 장르와 시대를 넘어 그들 역시 사랑 속에서 자신의 삶을 가꾸었고 이별에 눈물을 흘렸으며 사랑에 지나치게 탐닉한 나머지 본의 아니게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심심찮게 보이곤 했다. 그러나 범인들의 사랑과 달리 예술가들은 사랑을 또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갖고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행복과 절망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지만 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던 러브스토리를 꼽으라면 단연 ‘마르크 샤갈’과 ‘벨라 샤갈’의 사랑,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가슴 시린 사랑이다. 먼저 전염병으로 죽기까지 30년을 이어간 끈끈한 동지적 관계를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원색의 목가적인 풍경, 연인, 꽃 등의 평온함으로 표현한 샤갈과 벨라의 사랑은 기쁨의 빛이 예술로 드러난 정경들이랄 수 있다. |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벨라의 지혜롭고 슬기로운 혜안이 작용한 탓이 크다. 그녀는 가난하고 정식 교육도 받지 못했던 러시아계 유대인 샤갈에게 교양과 인격 그리고 해박한 지식을 가진 이상적인 여인이었으며 여덟 살이나 어렸지만 샤갈은 현명하고 어머니처럼 포근한 그녀와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행복의 빛을 화폭에 옮길 수 있었다
예술가 남편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은 또 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에 대한 ‘잔느 에뷔테른느’의 사랑이 그렇다. 사후 5년이 지나서야 합장된 이 커플의 사랑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회자되고 있지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잔느가 보여준 숭고한 사랑에 모딜리아니가 동승한 결과이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위대한 화가가 되겠다는 욕망아래 도착한 파리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한 모딜리아니는 좌절감에 빠져 술과 여자, 그리고 마약으로 세월을 보낸다. 이때 운명처럼 모습을 드러낸 여성이 바로 미술학도였던 잔느 에뷔테른느였다. 모딜리아니에게 한눈에 반해 부모의 반대를 물리치고 동거에 들어갔으나 남편의 천재성은 좀처럼 주목 받지 못했고 언제나 가난에 허덕였다. 모딜리아니는 카페에서 5프랑 짜리 초상화를 그려주며 겨우 생계를 유지했고, 잔은 임신한 몸으로 그의 곁에서 말없이 모델이 되어 주었다. 딸이 출생하자 모딜리아니는 잔과 결혼할 것을 맹세했으나 극심한 결핵을 앓고 있었다. 그는 혼인신고서도 작성하지 못한 채 가난과 병마에 쫓기며 살았고 여전히 예술성은 주목받지 못했다. 모딜리아니는 결국 심적 고통을 이기지 못해 폐결핵으로 피를 쏟으면서도 매일 술을 들이켰고 친구들이 그의 화실을 찾았을 때 이미 그는 얼어붙은 침대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모딜리아니는 이후 3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병원에서 의식불명인 채로 세상을 떠났고, 남편 없이 살아갈 자신이 없었던 잔느는 그 다음날 “하늘에서도 모델이 되어 줄게요.”라는 말을 남긴 채 친정집 아파트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22살이었으며 임신 9개월째로, 모딜리아니와 만난 지 미처 3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듯이 사랑이란 게 언제나 행복과 기쁨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잔인하여 ‘까미유 끌로델’을 사랑한 ‘로댕’으로 인해 숱한 가슴앓이를 했던 ‘로즈 뵈레’의 헌신적인 사랑이나 멕시코 벽화의 화가 ‘디에고 리베라’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지만 끝내 배신과 증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프리다 칼로’의 사랑은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을 낳아, “차라리 사랑이란 게 없었다면…”이라는 바람마저 들게 한다. 물론 우리네처럼 짝사랑에 힘겨워 극심한 좌절과 비극적인 슬픔에 시달렸던 예도 흔하며 그러한 예술가 중에는 ‘뭉크’나 ‘반 고흐’, ‘로트렉’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들의 그림들을 보면 흡사 ‘사랑이라는 고통을 먹고 성장한 끝에 피어난 눈물의 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뭉크-흡혈귀 |
잔인한 사랑에 고통 받은 예술가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사랑. 그것은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만큼 정열적인 것이었지만 미술 역사상 가장 비참했던 사랑이기도 했다. 사실 ‘프리다’라는 이름은 평화를 위한 염원을 상징하지만 일생동안 그녀에게 진정한 평화란 없었다. 영원한 사랑도 존재치 않았다. 단지 사랑을 가장한 디에고의 여성 편력과 사기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사랑이라 여기고 싶었던 불행한 사기. 남미 작가로서는 최초로 루브르에 작품이 소장될 만큼 예술적인 재능을 인정받았던 그녀였지만 칼로에겐 무엇보다 동료화가이자 스승이며 바람둥이 남편이었던 ‘개구리’라는 별명의 디에고의 사랑이 가장 소중했다. 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세 번의 유산과 이혼, 소아마비로 인한 하반신마비, 일생을 망쳐놓은 끔찍한 교통사고와 한 쪽 다리의 절단, 극에 달한 폐렴까지 이겨내며 그 남자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꼭두각시 인형역할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 대가는 늘 가슴 저리는 배신의 아픔과 커다란 재앙과도 같은 심각한 우울증이었다. 결국 디에고가 자신의 친동생마저 여자로 삼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녀가 느낀 것은 사랑이란, 특히 일방적인 사랑이란 비환상적이고 덜 아름다우며 불행한 고통이라는 것이었다. |
‘프리다 칼로’의 사랑이 남편에 대한 일방적인 것이었다면 ‘오귀스트 로댕’에 대한 ‘로즈 뵈레’의 사랑은 헌신의 전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미유가 로댕에게 빠져있을 때 로댕의 곁에는 이미 ‘로즈 뵈레’라는 동거녀가 있었다. 로댕은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카미유’를 모델로 <입맞춤>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스승과 제자로 만난 두 남녀의 격정적인 관계가 올곧게 도듬질 되어 있는 아름다운 걸작이다. 그런데 그 <입맞춤>에는 이 둘의 사랑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한 여인의 고통도 음각되어 있으니 그가 바로 ‘로즈 뵈레’이다. 카미유는 그녀와 헤어질 것을 수차례 종용했지만 로댕에게 있어 카미유와의 사랑은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로즈 뵈레’와의 이별만은 끝내 수용하지 않았다. 이는 카미유로 하여금 분노와 실망, 극한 경쟁 심리를 낳게 했으며 그녀는 그의 제자라는 선입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품제작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심지어 로댕에 의해 자신의 재능이 고갈되어 간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고 종국엔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삶을 파국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정작 안타까운 것은 까미유가 아니라 성공한 조각가도 아니었던 로댕을 처음 만나 어려운 살림을 도맡아 하며 로댕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기 위해 아낌없이 옷을 벗으면서도 로댕과 까미유의 관계를 묵묵히 보고 있었던 ‘로즈 뵈레’의 처지였다. 그녀는 로댕의 화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자유로운 섹스를 추구했던 로댕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다양한 모델들과 성관계를 가졌으며 로즈 뵈레는 그 모델들에게 포즈에 대해 설명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을 조용히 지켜봤고 남편임에도 로댕을 선생님이라 불러야 했다. 로댕의 아들까지 낳았지만 호적에 올리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모멸과 멸시, 그리고 자신을 내쫓으려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상처뿐이었다. 로댕도 그녀에겐 항상 무뚝뚝하게 대했으며 필요할 땐 언제든지 옆에 있기를 바랐다. 로댕은 그녀가 언제나 자신에게 바쳐질 것이라 생각했으며 그녀는 그것을 운명이라 여겼다. 그야말로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남자의 전형을 보여준 로댕 옆에서 그녀는 늘 상처를 끌어안고 살았다. 그나마 로댕이 죽기 2주일 전에야 다 쓰러져 가는 육체를 숨 가쁘게 이끌고 있는 그와 결혼식을 치르며 비로소 숨겨졌던 사랑에 대한 보답을 얻을 수 있었던 게 전부이니 사랑이란 참 묘한 것이랄 수밖에.

샤갈-over the town |
금지된 사랑과 자유로운 사랑의 딜레마. 금지된 사랑은 짜릿한 반면 숨어 있는 절망은 크다. ‘에두바르트 뭉크’나 ‘빈센트 반 고흐’, ‘툴루즈 로트렉’과 같은 화가들은 완벽하게 소유할 수 없는 사랑 앞에서 좌절하고 아파해야 했던 인물들이다. 예술은 사랑의 고귀한 구현이며 행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지만 변변한 사랑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그저 혼자만의 사랑으로 여생을 보낸 ‘반 고흐’도 그렇지만 여인을 팜므파탈로 그린 ‘뭉크’의 사랑은 여전히 특별하게 다가온다. 이들은 평생 사랑이라든가 기적이라는 단어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들의 머리와 가슴엔 현실만이 상주했으며 그 비관적인 사랑을 그림 속에 녹여냈다. 사람도, 사랑도 믿지는 않았지만 윤락가를 수시로 드나들며 그 여인들의 모습을 진정 사랑했으며 남의 이목으로부터 자유롭진 않았지만 그림 속에서만큼은 자유를 찾았다. 비록 사랑이 무엇인지 밤새 술에 절어 소리 없는 야상곡처럼 흐느끼긴 했지만 이들에게 예술은 사회와 달리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 원천이었고 새로운 삶이었다. |
하지만 사랑에 넘쳐 숱한 여인들을 곁에 두었던 ‘피카소’나 ‘클림트’, ‘들라크루와’는 역사적으로 이들과 대척점에 서 있어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이중 문란한 성생활과 여인들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이야말로 창작의 원천이었던 20세기 최고의 천재 ‘파블로 피카소’는 여인들을 지독히도 탐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요, 필요에 의해 여인들을 유혹하고 버리기를 반복했던 천하의 바람둥이로써 손색이 없다.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질 때까지 약 5만여 점에 달하는 작품들을 쏟아 내는 괴력을 보임과 동시에 내외적으로 많은 사람들(특히 여성들)을 등장시킴으로서 자신을 지탱하는 예술의 주된 모티브가 곧 사람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내 보였던 그.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보헤미안이 되어 몽마르트를 헤매던 젊은 시절부터 화상 ‘앙부르 아즈 볼라르’가 발굴하기까지 많은 이들과 교류하면서도 유독 아름다운 여성들과의 사랑을 원천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던 인물이다. 그와 사랑했던 여인들 중 ‘페르낭드 올리비에로’는 피카소가 청색시대를 벗어나 장밋빛시대를 열게끔 한 장본인이며 ‘에바 구엘’은 큐비즘의 미학을 절정에 달하도록 영향을 주었다. 첫 아내인 ‘올가 코클로바’는 그가 사실주의경향의 그림으로 회귀하도록 이끌었으며 ‘마리테레즈 발테르’는 작품 <꿈 1930>의 모델이자 순애보적인 사랑을 펼친 여성으로 남고 있으며, <우는 여자(1937)> <게르니카(1937)>로 대표되는 ‘도라 마르’는 지성적인 사진작가로 피카소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연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새로운 여성을 갈구했고 필요 없다 싶으면 휴지처럼 버렸던 피카소의 인생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은 ‘타인의 영감이자 원천’이었다는 긍정성과는 달리 비극 일색이었다. 첫 번째 부인 ‘올가’는 다른 이의 아내가 되었다가 다시 돌아왔으나 피카소에 의해 버려졌고 두 번째 여인 ‘에바 구엘’은 피카소와 동거 중 결핵으로 죽었으며 네 번째 여인 ‘마리테레즈 발테르’는 목을 매어 자살했다. 마지막 여인으로 알려져 있는 ‘자클린 로크’ 역시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결과만 놓고 보면 피카소에게 있어 많은 여인이란 자신들의 삶이야 어떠했든 그에게 창조적인 세계로 가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칼로와 디에고 |
예술가도 인간이고 미술사 역시 인간인 만든 발자취이다 보니 그들의 예술세계가 기록된 책들을 들여다보면 미학적 관점 외에도 지극히 인간적인 러브스토리도 흥미롭고 다양하게 내재되어 있다. ‘마르크 샤갈’과 ‘벨라 샤갈’의 경우에서 읽혀지듯 가슴 찡한 사랑으로 승화된 이야기가 있고 죽음도 갈라놓지 못할 만큼 애절한 사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와 ‘잔느 에뷔테른느’의 사랑은 형체도 알 수 없는 달콤한 묘약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큰 행복과 위대한 업적을 제공하는지 일러주는 예가 있는 반면 세기의 문호인 ‘니체’와 그의 여동생 ‘엘리자베트’와의 관계처럼 절대 이룰 수 없는 사랑 앞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했던 스토리도 존재한다. 그뿐이랴 사랑 중에는 ‘앤디워홀’과 ‘바스키아’, ‘랭보’와 ‘베를렌’, ‘버지니아 울프’와 ‘빅토리아 색빌 웨스트’는 금기를 깬 동성애적 사랑을 추구했으며 영원한 롤리타 콤플렉스로 기록되고 있는 ‘에곤 쉴레’ 식의 정신 병리학적인 시각에서 들춰볼 수 있는 사랑도 엿볼 수 있다.
어쨌든 좋든 나쁘든 예술가에게 사랑은 또 하나의 예술이었음엔 확실하다. |
소녀들을 그려 징역까지 살아야 했던 에로티시즘의 대가 ‘에곤 쉴레’라든가 엽색적인 애정 행각을 벌였던 ‘쿠스타프 클림트’, 아내와 시녀 사이의 종잡을 수 없는 사랑을 보여준 ‘얀 베르메르’, 그리고 앞서 설명한 ‘오귀스트 로댕’과 ‘카미유 끌로델’처럼 제자에서 조수, 모델, 연인으로 발전한 경우를 수없이 발견되고 이들을 엮는 구심점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사랑은 온화함과 날카로움, 행복과 불행이라는 양면을 지니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는 ‘렘브란트’와 ‘사스키아’처럼 신분의 벽을 뛰어 넘는 사랑도 목격할 수 있으며 서로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는 관계였던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분출하는 욕망이 오히려 영감의 원천이었던 ‘피카소’와 그 여인들, 성과 욕망이 소외로 번졌던 ‘고갱’이나 ‘로트렉’, 그리고 ‘반 고흐’같은 일방적인 사랑도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화가들이 다양한 대상들을 통해 예술적 영감을 얻거나 욕망의 대상으로 여겼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스쳐가는 인연, 삶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이들로 인해 화가는 창작 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화가들의 그림 속에는 그것의 원천이랄 수 있는 ‘누군가’의 애절한 사랑이 늘 존재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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