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들

손관승 특파원의 유럽 문화 산책-8

닥터허 2008. 8. 20. 05:59
하늘을 나는 겨울 오리들 틈에서 그대를 본다”

예전부터 파리 생제르맹에 있는 카페들을 비롯해 유럽의 몇몇 카페들은 꿈을 가진 예술인들의 집결지였다. 샘터사의 찻집 '난다랑'과 동승동은 한국의 생제르맹 역활을 했는데 그곳에서 많은 무명의 작가와 명사들이 '사람의 정'으나누면서 새로운 문화를 생산했었다. 힘겨운 투병 생활 끝에 지난 1월 8일 타계한 동화작가 정채봉(사진)역시 '난다랑' 단골 손님 중 한 명이었다. 필자는 그와의 인연을 돌아보면서 그의 부재를 돌아보면서 그의 부재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의 부음을 들은 곳은 ‘문학 카페’에서였다. 이렇다하게 반겨주는 이도 많지 않은 이국 생활에서 그 카페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시내 중심에 있으면서도 정원이 딸려있고 월요일 저녁마다 문학 작품 낭송회가 끊이지 않고 열리는 데다, 같은 건물에 함께 들어있는 자그마한 책방에선 종업원들이 친절함을 잃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곳은 어느덧 베를린에서 일종의 ‘출입처’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지만 소중한 것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날 나는 두 권의 책을 그 책방에서 골랐다. 한 권은 베른하르트 슐링크(Bernhardt Schlink)가 쓴 소설 이었고, 또다른 한 권은 네덜란드 작가 세스 노테봄(Cees Nooteboom)의 산문집 이었다. 2년 전쯤 한국에서도 <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던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을 다시 고른 것은 그가 베를린대학에서 헌법학을 가르치는 법률학자이면서도,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한 최초의 독일 작가이며 놀랍게도 전후 독일어로 된 작품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혔다는 기록을 세웠고 지금 그의 소설이 영화로 찍히고 있다는 유명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간과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느끼고 싶은 유혹 때문이었을 거다. 지난해에도 어김없이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세스 노테봄은 네덜란드 사람이지만 스페인에서 주로 글을 쓰고 남미와 일본, 남태평양을 돌며 여행을 많이 한 작가로 유명하다. 얼마 전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독일어권 3개 텔레비전이 합작해 만든 문화 전문 채널 ‘3Sat’의 대담 프로그램에 나온 그가 스위스의 여류 평론가와 유창한 독일어로 자기 작품에 대해 담론을 나누는 것을 보고 그의 탁월한 외국어 실력과 탁 트인 세계관에 부러움을 금치 못한 적이 있었다. 그날 ‘문학 카페’에서 두 권의 책을 만지작거리며 신문에서 미국 반전 가수의 대명사 조안 바에스가 어느덧 환갑이 되었다는 기사를 듣고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던 중, 그의 부음을 들은 것이다. 그 역시 작가였다. 그는 늘 허스키한 목소리에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달고 다니던 동화작가였다. 정채봉-그와 처음으로 만났던 장소가 기억에 생생하다. 지금은 ‘밀다원’으로 이름이 바뀐 동숭동 ‘샘터사’의 찻집 ‘난다랑’에서였다. 그는 시험 감독, 나는 수험생이었다. 아직 우리 문화계에 일정한 파워를 갖고 있었던 샘터사는 전무후무한 입사 시험을 치렀다.

고 김수근이 설계했다는 붉은 벽돌과 넓은 유리창으로 만든 집의 시원하게 탁 트인 난다랑 2층 탁자에 한 명씩 앉아 커피 한 잔씩 앞에 두고 작문 시험을 치러야 했다. 두 개의 작문 시험 가운데 하나는 ‘먼 별에 살고 있는 외계인에게 보내는 편지’ 비슷한 제목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동화작가다운 발상이었다. 생텍 쥐베리의 <어린왕자>를 연상케하는 시험 제목도 제목이었거니와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험을 치른다는 생각 자체가 나에겐 경외로웠다.

카페 난다랑은 그냥 커피만 마시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이라는 이름 아래 치러지는 편집 회의실이었다.
훗날 한 사람은 동화작가로, 또 한 사람은 시인으로, 또 한 사람은 신문사의 편집국장으로 각각 이름을 얻게 되지만 당시 우리는 이름을 얻지 못한 무명들이었다. 어쩌면 카페는 이미 이름을 얻은 사람들을 위한 장소라기보다는 이름을 얻기 위한 자들이 기다리며 갈증을 달래는 정거장이다.

한 시대를 기다리며 취리히의 카페 모퉁이 단골 자리를 서성거리던 레닌이나 베니스의 ‘카페 플로리언’에서 조금씩 영향력을 얻기 시작하던 프로스트와 바이런, 그리고 빈의 ‘카페 센트럴’에서 자기를 키워가던 슈테판 츠바이크의 자취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어렵게 지도를 보아가며 찾아나선다. 그것은 반드시 지적 허영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자기에게도 그 시대가 오기를 소망하는 간절함의 발로이리라.
아직 가난하고 나치 수용소에서 석방된 직후 무명이었던 샹송 가수 줄리에트 글레코가 배고파 무작정 찾아든 카페에서 당대 최고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그녀가 저음을 낼 때 눈에서 1만 볼트의 전압이 방사된다”고 말해 유명해진 ‘드 플로레’와 알베르 카뮈가 글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인기 높았던 카페 ‘오 되 마고’ 때문에 파리의 생 제르맹에는 지금도 세계인들이 몰려든다.
난다랑과 동숭동은 한국의 생제르맹이었다. 원고 청탁을 한 뒤 가져오는 작가들이나 명사들을 만나 이름으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탐색전을 펼친 것도 그곳이었다. 대체 그런 법이다. 최초의 독서는 아버지의 서가에서 아무렇게나 뽑은 책에서 시작되듯이, 대가의 어깨 너머로 슬쩍슬쩍 넘겨다보는 데서 거장의 발걸음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비상의 날개를 열심히 갈고닦던 무명의 정채봉을 나는 목격했었다.

여의도에 와서 가장 아쉬운 것 가운데 하나는 제대로 된 카페가 없다는 것이다.
싸구려 분냄새 나는 여자들의 뒤꽁무니를 쫓는 엉큼한 장소 아니면 폭탄주가 교차하는 객기와 오기의 장소는 넘쳐나도, 정신적 허기를 달래줄 공간을 찾기 힘들다. 한국 최고의 문화 생산지이면서도 그런 문화 생산자들을 이어주는 접점을 찾기 힘들다.
사람들에겐 네트워크가 필요한 법이다. 개인과 개인을 이어줄 접점, 그것이 바로 카페이다. 미국 할리우드의 카페에서 차를 나르는 여자 종업원들은 하나같이 원래 직업이 배우이고, 주유소에서 일하는 남자들은 으레 집의 벽장 안에 한두 개의 시나리오를 숨겨두고 있다는 우스개는 뭘 말하는가. 내가 첫 책을 냈을 때, 인사동의 밥집에서 그때 그 얼굴들이 오랜만에 다시 뭉쳤다. 정채봉은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밥값을 내게. 우린 준비해온 술값으로 대신 자네 책을 사줄게.” 이미 열댓 권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선배 글쟁이로서 마음을 잘 읽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은 술을 잘 사주고, 밥은 잘 사줘도, 책이나 작품을 사주는 데는 인색하다. 술집과 식당은 번성해도, 서점과 출판사가 날이 갈수록 쪼그라드는 것은 바로 그런 때문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그의 부음을 듣고 문학 카페를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들이 차가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시인 정현종이 인권 변호사 황인철이 세상을 떴을 때 영전에 바쳤던 조시 가운데 한 구절이 떠올랐다.
‘… 차가운 하늘을 날아가는 겨울 오리들 틈에서 그대를 본다. 춥겠다. 그대의 깃은 아직 세상을 따뜻하게 하고 있는데 …’
무력감을 느꼈다.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져가고, 보고 싶은 얼굴들이 사라져가도 멀리서 버둥거리기만 할 뿐 어쩔 수 없는 존재 -그것이 해외에 근무하는 특파원의 숙명이다. 아기였을 때 어머니를 잃고 할머니의 품에 자라 늘 엄마를 그리워했던, 늘 글썽거리던 그의 눈망울이 떠올랐다. 지긋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뜨거운 무엇인가가 흘러나올 테니까.

글 손관승 베를린 특파원(sonbal@imbc.com)